나타샤,소냐는 왜 조선 청년의 ‘마돈나’가 됐을까

2021-10-10

30

백석의 ‘나타샤’, 염상섭의 ‘쏘니아’
文靑의 로망으로 떠올라
 
 
아오야마 학원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백석은 1936년 함흥 영생여고 영어교사로 부임했다.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는 나타샤가 조선 청년들의 '마돈나'로 자리잡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아오야마 학원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백석은 1936년 함흥 영생여고 영어교사로 부임했다.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는 나타샤가 조선 청년들의 '마돈나'로 자리잡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올 상반기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열린 특별전 '미술이 문학을 만났을 때'에 전시된 백석 시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 조선일보에서 발행한  월간지 '여성' 3권3호(1938년3월)에 실렸다. 삽화는 정현웅이 그렸다. 백석은 '여성' 편집자이기도 했다.
 
올 상반기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열린 특별전 '미술이 문학을 만났을 때'에 전시된 백석 시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 조선일보에서 발행한 월간지 '여성' 3권3호(1938년3월)에 실렸다. 삽화는 정현웅이 그렸다. 백석은 '여성' 편집자이기도 했다.

나타샤와 카추샤, 소냐는 100년 전 모던 보이들을 설레게한 이름이다. 청년들의 ‘마돈나’이자 연인(戀人)을 가리키는 대명사였기때문이다. ‘가난한 내가/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로 시작하는 백석의 ‘나타샤’가 대표적이다.

김광균과 오장환도 나타샤를 작품속에 불러들였다. ‘나타ㅡ샤 같은 계집애가 우산을 쓰고/그 우를 지나간다’(김광균, ‘눈 오는 밤의 시’일부, 1940년 5월)거나 ‘나타샤는 마우재, 쫓긴 이의 딸/나 혼자만 살았느냐/고향이 있어서’(오장환, ‘고향이 있어서’일부,1940년 12월). 나타샤는 어쩌다 조선 청년의 마돈나가 됐을까.

◇문학적 족보없이 홀연히 나타난 나타샤
‘시베리아의 향수’를 쓴 러시아 문학 연구자 김진영 연세대 교수는 톨스토이 ‘부활’의 카추샤나 도스토옙스키 ‘죄와 벌’의 소냐와 달리 나타샤는 문학적 혈통이 뚜렷한 이름이 아니라고 했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에 나오고 도스토옙스키와 투르게네프 소설에도 등장하지만 당시 화제를 모은 인물이 아니거나 작품 자체가 별로 인기를 끌지 못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나타샤는 변변한 문학적 족보도 없이 홀연히 조선 문학에 출현했다’는 얘기다. 나타샤는 문학적 원형이 뚜렷하지 않은 덕분에 ‘조선의 나타샤’, ‘나의 나타샤’로 쉽게 받아들여졌고 우리 작가들의 작품속에 녹아들었다.
톨스토이 '부활'을 초역한 소설 '해당화'. 1918년 최남선이 이끌던 신문관에서 냈다. 역자인  박현환은 정주 오산학교 출신으로 이 책을 번역할 당시 오산학교 교사로 있었다./국립중앙도서관
 
톨스토이 '부활'을 초역한 소설 '해당화'. 1918년 최남선이 이끌던 신문관에서 냈다. 역자인 박현환은 정주 오산학교 출신으로 이 책을 번역할 당시 오산학교 교사로 있었다./국립중앙도서관

◇유진오의 나타샤, 함대훈의 나탈리야
해방 후 초대 법제처장과 고려대 총장을 지낸 유진오(1906~1987)가 1942년 발표한 단편소설 ‘신경’(新京)엔 나타샤가 나온다. 만주국 수도인 신경을 찾은 주인공 철은 미지의 여성 나타샤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지켜보며 ‘러시아 귀족 후예’를 떠올린다.
‘각가지 나라 말을 뒤섞어 이야기하고 있는 동안에 철은 여자의 이름은 나타ㅡ샤라는 것, 그 집은 보통 음식점이 아니라 캐바레라는 것, 나타ㅡ샤는 그곳에서 춤추고 있는 여자라는 것을 알았다. 문득 철은 이 여자도 소문에 듣던 로서아 귀족의 딸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였다.’
연극평론가 함대훈(1896~1949)은 ‘나탈리야’를 추억한다. 1933년 발표한 ‘외국어와 이국여성’(신여성 7권1호,1933년1월)에서다. 러시아어 개인교습을 해주던 전직 외교관의 딸이다. 집으로 찾아간 그를, 출타한 아버지를 대신해 나탈리야가 집안으로 안내한다. ‘그 명랑하고 리즈미칼한 발음…그 어여쁜 얼굴에 띄우는 미소! 언어와 동작이 자연스럽게 노는 그 여자와의 회화! 지금도 잊지못할 기쁨의 추억이다.’

◇염상섭의 ‘쏘니아’, 안석주와 안회남의 ‘소니아’
염상섭은 1929년 9월22일부터 10월2일까지 ‘죄와 벌’ 여주인공 소냐를 예찬하는 글을 다섯 차례 썼다. ‘찰스턴을 춤추는 모던 걸, 재즈에 광취(狂醉)하는 모던 보이’를 향해 ‘감히 쏘니아에게 돌을 던질 자가 누구냐’고 곧장 묻는다. ‘나는 쏘니아와 같이 운다. 가을 밤 궂은 비와도 같이 운다. 인류의 불행을 탄식하는 마음으로 운다. 나는 쏘니아를 공상의 세계에서 포옹한 아리따운 연인으로서 위로하려 함이다. 나는 쏘니아의 영혼을 바라보고 감격에 떤다. 그의 썩은 육체안에 숨은 정의의 마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쏘니아 예찬’2, 조선일보 1929년 9월24일. 파란 부분을 누르면 옛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만문만화가는 물론 배우, 작가, 영화감독 등 팔방미인이었던 안석주도 잡지 기획에서 소냐를 떠올렸다. ‘나는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을 읽었을 그 때는 이미 여러해 전이었으나 그 때 내 자신이 예술 방면에 파묻혔던 까닭인지 굳센 청년으로서의 고민이 남유달리 있었던 듯하였던 때여서 그랬던지 이 ‘소니아’를 찾아보려고 한 때도 있었다…’소니아’가 조선에도 있었는지 있을 것인지?’(내가 좋아하는 소설의 주인공이 실재해 있다면?: 라스콜니콥프의 소니아, 신여성 1933년2월) 안석주와 함께 이 기획에 참여한 안회남은 ‘소니아의 애인 라스콜니코프가 되고 싶다’고 노골적으로 고백한다.
조선일보 1929년 12월13일자에 실린 톨스토이 '부활' 요약본 첫회. 12월18일까지 5회 연재됐다.
 
조선일보 1929년 12월13일자에 실린 톨스토이 '부활' 요약본 첫회. 12월18일까지 5회 연재됐다.

◇ ‘카츄샤의 나라’ 노서아
사랑에 배신당하고 추락한 여인 ‘카추샤’는 애잔한 연정의 대상이었다. 귀족청년 네흘류도프에게 짓밟힌 뒤 윤락가에 빠진 ‘부활’의 여주인공 카추샤는 톨스토이가 1899년 이 작품을 발표한 직후 일본, 그리고 조선에 순차적으로 소개되면서 선풍적 인기를 누렸다. 특히 1918년 최남선이 이끌던 신문관에서 펴낸 번안소설 ‘해당화-賈珠謝애화’는 대중이 환호한 베스트셀러였다. 번역가 박현환은 정주 오산학교 출신으로 일본 세이소쿠 영어학교에서 유학하고 돌아온뒤 오산학교 교사로 일했다. ‘부활’을 번역한 것도 이 때의 일이다. 박현환은 3.1운동 직후 상하이로 망명,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몸담고 ‘독립신문’ ‘신한청년’을 이끌기도 했다.
 
조선일보에 러시아 기행을 연재한 김준연은 러시아를 아예 ‘카추샤의 나라’로 불렀다.’백설(白雪)을 뺀 서백리아(西佰利亞·시베리아)는 나에게 퍽 적막하고 무미건조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카추샤’의 나라는 눈 있을 때 와야되겠고 눈 있을 때 보아야 되겠다.’(조선일보 1925년 4월28일 ‘노서아 가는 길에’)
소설가이자 극작가이면서 동양극장 지배인이었던 당대 문사 최상덕은 톨스토이를 알기 전에 먼저 카추샤를 알았다고 했다. ‘이인직을 알기 전에, 이광수를 알기 전에, 염상섭을 알기 전에, 김동인을 알기 전에, 최학송을 알기 전에 톨스토이를 알았다. 그리고 톨스토이를 알기 전에 ‘카튜샤’를 알았다.’(최상덕, ‘갓주사’와 나, 매일신보 1935년 11월20일)
배우 출신으로 ‘황성의 跡’(황성옛터)을 불러 1930년대 인기 스타로 떠오른 이애리수는 ‘카추샤’를 자신에게 가장 잘어울리는 배역이라고 답하기도 했다.(조선일보 1930년1월1일 ‘
아홉살에 첫 무대, ‘카추샤가 適役’의 이애리수’)
카추샤는 신문, 잡지에서 순정을 배반당하고 악의 구렁텅이로 빠지는 비극적 여성의 대명사로 자주 호명됐다. 여공 생활하다 하룻밤 사랑으로 낳은 아기를 죽이고 여급으로 전전하다 길림성 작부로 팔려가던 중 체포된 스물두살 최OO의 사연을 소개하는 기사 제목이 ‘
모던 ‘카추샤’ 애화’(조선일보 1934년7월20일)였다.
연극 막간에 '카추샤의 노래'를 불러 대유행시킨 이애리수. 1930년대 '황성옛터'로 더 유명해졌다. 조선일보 1930년 1월1일자 신년호에 인터뷰했다.
 
연극 막간에 '카추샤의 노래'를 불러 대유행시킨 이애리수. 1930년대 '황성옛터'로 더 유명해졌다. 조선일보 1930년 1월1일자 신년호에 인터뷰했다.

◇소설·연극보다 히트한 이애리수의 ‘카츄샤의 노래’
‘부활’은 연극으로도 대중과 만났다. 무대로 옮길 때는 여주인공 카추샤가 제목이 됐다. 1916년 이기세, 윤백남 등 동경 유학생들이 만든 신파극단 ‘예성좌’가 처음 ‘카츄샤’를 올렸다. 이 공연에선 여장 배우 고수철이 바이올린과 퉁소 반주에 맞춰 막간에 불렀던 ‘카츄샤의 노래’가 인기를 끌었다. 1915년 내한 공연을 가진 일본 극단 ‘예술좌’의 ‘카츄샤’를 바탕으로 올린 공연이었다. 일본 극단이 만들어 막간에 부른 ‘카츄샤의 노래’는 1920년대 이애리수의 노래로 대유행했다.
신극단체 토월회는 1923년 조선 최초 여배우 이월화를 주인공삼아 연극 ‘카츄샤’를 올려 히트를 쳤다. 유치진 홍해성이 이끈 극예술연구회는 1937년4월 부민관에서 서항석 연출로 ‘카추샤’를 이틀간 올렸고, 동양극장도 그해 12월 ‘카추샤’를 공연했다. ‘카추샤’는 일제시대 가장 있는 연극 레퍼토리 중 하나였다.
소설이나 연극보다 카추샤를 더 유명하게 만든 건 노래였다. 일제시대 막간 노래로도 인기를 누렸지만, 1960년 김지미·최무룡 주연 영화 ‘카츄샤’에 들어간 삽입곡 ‘카츄샤의 노래’는 지금도 즐겨 부르는 이들이 많다. ‘마음대로 사랑하고/마음대로 떠나가신/첫사랑 도련님과/정든 밤을 못잊어’로 시작하는, 바로 그 노래다. 유호가 노랫말을 쓰고, ‘꿈꾸는 백마강’을 지은 이인권이 작곡했다.

◇1920년대 휩쓴 러시아 문학
러시아 여인들은 어쩌다 조선 청년들의 연모의 대상이 됐을까. 나타샤와 카추샤, 소냐가 조선 청년들의 ‘마돈나’로 떠오른 데는 러시아 혁명에 대한 관심과 함께 일제시대 압도적이던 러시아 문학의 영향력을 빠뜨릴 수없다. 러시아 문학은 1920년대 조선에 소개된 해외문학 중 영문학에 이어 2위를 차지할 만큼 주목을 받았다. 김병철의 ‘한국근대번역문학사연구’(1975, 을유문화사)에 따르면, 신문·잡지에 번역된 작품만 127편(영문학 151편)이나 됐다. 프랑스(100편), 독일(68편)을 한참 앞선다.
소설만 놓고보면 영문학을 능가할 만큼 서구 문학 중 가장 활발하게 국내에 번역 소개됐다. 체호프 작품이 가장 많이 신문·잡지에 실렸지만(11편), 단행본까지 합하면 톨스토이가 가장 많이 읽혔다. 투르게네프, 고리키의 인기도 높았다.
톨스토이는 당시 신문에 종종 ‘두옹(杜翁)’으로 소개됐다. ‘두씨 할아버지’쯤 될텐데, 그는 당시 조선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외국 작가였다. 타계 25주년이던 1935년 조선의 일간지들이 앞다퉈 전면 특집을 실을 정도였다. 100년 전 조선 청년들이 연모하던 ‘나타샤’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의견 달기(0)
글쓴이 내용 일자

이 름

입력박스 작게   입력박스 크게


아래 새로고침을 클릭해 주세요.새로고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