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란 무엇인가

2021-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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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여덟 무렵이었을까.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인생이란 초원과 같다고.” 지리담당 선생님이었던 걸로 기억이 난다.

‘멀리서 보는 초원은 아름답지만 점점 다가갈수록 그 안에 깃등 모습들은 처음 상상했던 것과는 달리 실망스럽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것이 인생이다.“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이제 곧 성년이 돼 대학이나 사회로 나갈 우리들을 위해 들려주신 그 말씀이 문득 떠오르는 건, 다시 졸업시즌이 왔기 때문은 아닐는지. 그러고 보니 얼마 전 고교동문회에서 보내온 문자메세지에 ‘졸업 30년’이라고 적혀있어 그야말로 쏜살같이 흘러간 세월을 실감할 수 있었다.

‘질풍(疾風)과 노도(怒濤)’의 시기를 지나며 친구들과 “인생은 술 깬 아침”이라느니, 혹은 “사는 게 별 것 아니다”느니, 마치 삶을 달관(達觀)한 사람처럼 예의 술자리에서 떠들어댔다.

지금 와 생각해보면 낯간지러운 한 때의 치기(稚氣)일 수도 있겠지만 염세(厭世)에 가까웠던 그 시절. ‘인생’은 청춘을 관통하는 치명적인 유혹으로 주위를 맴돌았다.

그렇듯 우상(偶像)은 없고 유행가 가사와 같은 ‘언어의 유희(遊戱)’에 빠져 마냥 비틀거릴 것만 같았던 청춘도 덧없이 흘러갔다. 그 때의 친구들도 이제 중년이 돼 대체로 제자리에서 온전히 잘살고 있다.

물론 잘살고 못사는 것을 가르는 척도(尺度)는 없다.
단지 얼마나 오랫동안 소통(疏通)하면 덜 부끄럽게 살아왔는지, 적어도 인생을 살며 소중한 우정을 이야기할 때 그것만은 변함없이 유효하다.

아낌없이 다 주어도 아깝지 않은 친구가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그 인생, 성공한 삶이라지 않는가.

지금 인생을 이야기 하면서 한 여인의 고백을 소개한다.
여고시절, 피천득의 수필집 ‘인연’에 나오는 ‘구원의 여상(女像)’에 사로잡혀 30년 세월을 살아왔다는 그녀. 집안의 장녀로 대학을 나와 스물여섯 나이에 딸 둘이 딸린 직장상사와 결혼해 마흔 무렵 불의의 교통사고로 남편을 잃고 10년 세월을 살아온 그녀의 인생,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선택한 남편을 떠나보내며 자신을 놓아줘서 고맙다고 했다던가.
자신이 낳은 딸 하나를 포함해 한 해에 딸 셋을 출가시키면서 이젠 진정한 자유이겠거니 생각했는데, 시집보낸 딸들 걱정에 한시도 마음 편할 날이 없다는 그 녀의 인생은 숙명에 인종(忍從)하는 여인의 모습을 보는 것만 같아 왠지 씁쓸하다.

물로 인생이 비단길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걷다보면 진흙탕길과 같은 험한 길도 만나는 게 인생길이 아니던가.
앞서의 인연과 달리 전라도를 여행하면서 만난 어느 아주머니의 인연은 감동적이다.
아주머니 역시 남편과 사별하고 지금의 영감님과 재혼해 살고 있다고 했다.
늘그막에 만나 서로를 의지해 살면서 아주머니가 본 영감님은 ‘강물 같은 사람’이다.
“우리 영감은 말씨, 강물 같은 사람이여라. 좋아도 좋은 내색, 싫어도 싫은 내색도 없이 그저 빙긋 웃으면 그만이랑께.”

한국전쟁 때 이북에서 피란 내려와 가족과 헤어져 생사도 모른 채 살아왔다는 아주머니.
그 삶이야 비록 여느 욕심 없는 촌부(村婦)의 모습이지만 누가 그 인생을 불행하다 하겠는가.

흔히 인생의 선택을 이야기할 때의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을 인용하곤 한다.
그 선택은 때로 숙명처럼 다가와 절망에 빠지게도 하지만, 마음먹기에 따라 얼마든지 행복하게 걸어갈 수도 있다.
따라서 인연은 무엇보다 소중하고 그 소중함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조계종 초대 종정을 지낸 한암(漢岩)스님이 자신의 오도(悟道) 과정을 담은 구도기 제목을 ‘일생패궐(一生敗闕)’이라고 했다. 사전적 의미로 ‘이번 생은 크게 망쳤다’는 뜻이다.

선승들이 남긴 글을 보면 논리적으로 해석이 불가능한 대목이 많다.
입선(入禪)을 알리는 죽비소리를 듣고 개오처(開悟處)를 찾았고, 아궁이에 불을 붙이다가 홀연히 깨달았다는 한암 스님. 그러한 스님의 경지는 세속의 잣대로는 감히 잴 수 없는 격외(格外)의 경지요, 동시에 겁외(劫外_의 경지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고승이든 범부든 간에 인생은 인생일 뿐, 감당해야할 무게는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다.

마음과 싸우지 말라고 했다. 잠시 옆으로 내려놓으면 그만이다.
삶은 풀어야 할 문제가 아니라 살아야 할 신비라고 했다.
삶은 그 자체만으로 충분히 아름답고 가치가 있다는 말이다.
인생은 하루하루가 늘 새롭다.
다시 봄이 오고 있다.
사계절의 출발인 봄을 맞아 새로운 기분으로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
지금 살고 있는 오늘이 소중한 것은 어제 세상을 떠난 사람이 그토록 원했던 내일이기 때문이다.
인생은 누구에게나 소중하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묻는다면, 덧없고 덧없음을 말해 무엇 하랴.
그저 살아볼 수밖에. 그것이 인생이다. 

(이해덕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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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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